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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사랑은 - 채호기

by tirol 2003. 1. 31.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채호기, 수련, 문학과지성시인서 264, 2002/


* tirol's thought

지난 주에 산 채호기 시집을 뒤적이다가
쉬운 시로 하나 골랐다.
요즘은 시가 잘 안 읽힌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마음이 점점 산문적이 되어가는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치기어린 감상적 행동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대학 1학년 때 한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을 사서 읽곤 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시가 멋있어 보였고 시랑 친해보고 싶었다.

첫사랑의 기억이 희미해지듯이
나도 조금씩 시를 잊어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