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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눈 - 김명인

by tirol 2004. 11. 24.


김명인


꽃이 핀다, 일만 세계의 저편에
내 일만 번 눈맞춰둔 별이 있음을,
그 별을 스쳐 여기에 닿는
인연의 무한한 짧음이여!
죽음이 여러 죽음을 거쳐 눈 날리듯
문득 옷깃으로 스치는 목숨의 또 다른 변신,
그대는 어느 별자리에서 이리로
사뿐히 옮겨오시는가
손을 펴면 한아름 가득 눈부시게
손짓해 다가오는 눈, 눈, 눈

Tracked from http://blog.naver.com/skyman63/120007880236

* tirol's thought

언제부턴가 눈이 오는 것을 썩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다.
눈 때문에 차가 막히는 것도 짜증스럽고, 대기의 온갖 오염물질을 품고 내리는 그것들을 우산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맞는 것도 찜찜하다. (작년 말께부터 앞머리가 심하게 빠지기 시작했는데 이거 정말 신경쓰인다).
그런데 시인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이 시인은 그 눈을 보면서 '그대는 어느 별자리에서 이리로/사뿐히 옮겨오시는가'라고 노래한다. (물론 시인도 눈을 실제로 맞는 것이나 눈때문에 차가 막히는 것은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은 나희덕 산문집의 한 구절이 떠올라 적어둔다.

'... 실제로 하나의 대상을 가지고 시를 쓰는 과정은 사랑이라는 일치의 경험이나 신적인 것이 현현(顯現)하는 순간과 매우 유사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좇는 행위, 일종의 사로잡힌 상태, 일상적 경험으로부터의 이탈, 목숨을 건 도약의 순간, 낯선 것을 접할 때의 신성한 공포......' (나희덕,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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