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tirol's thought
최근 권석천씨가 펴낸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읽다가 이 시를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던 때는 1991년 가을 (시집의 맨 앞 장에 그렇게 적혀있다)
그 해 가을 이 시를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먼 훗날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애인을
만들어 연애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던가 그러다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던가 아마도 분명히 어쩌면
찬미와 갈구와 하소연으로 이루어진 기도처럼
여러 번 만나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나고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숨쉬고 숨졌던 날들
그날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 다시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듣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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