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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by tirol 2018. 4. 2.

옮겨가는 초원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나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 문태준 시집, 먼 곳, 창비, 2012.



tirol's thought


'그대와 나 사이의 초원'은 축복인가 징벌인가 그리움의 근원인가 막막함의 이유인가.

문태준 시집 '먼 곳'은 출간되던 그 해에 읽었는데 이 시를 읽었던 기억은 없다.

주말에 다른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 시의 일부가 인용된 걸 보고 다시 찾아 읽는다.

왜 세상의 어떤 것들은 기억되고 어떤 것들은 기억되지 않는가.

왜 스쳐지나거나 잊혀진 어떤 것들은 다시 떠올려지고 어떤 것들은 영영 사라지는가.

생각해보니 '영영'이라는 말은 아주 나중에야 할 수 있는 말이겠구나.

기억하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다시 떠올려질 가능성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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