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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그래서 - 김소연

by tirol 2018. 9. 4.

그래서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김소연, ,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2013)

* source: http://abcwriter.tistory.com/32?category=194017



* tirol's thought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그래서'의 앞과 뒤는 이어져 있다.

어떤 것들은 단단하게 어떤 것들은 느슨하게.

'잘 지내는 일'과 '말라가는 슬픔'은 

얼마나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을까.

문 안에서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문 바깥에 도착한 내일의 냄새를 모른척 하기.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말라가는 슬픔.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빨래들처럼 젖어있는 슬픔.

슬픔이 깨어날까봐 조심스러운.

또다시 살아있을까봐 두려운.


'슬픔이 말라가요 그래서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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