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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여름의 할일 - 김경인

by tirol 2021. 6. 19.

여름의 할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김경인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문학동네, 2020>


* tirol's thought

 

오랜만에 찾아 올려보는 광화문 글판의 시.

2021년 8월 말까지 걸려있게 될 2021년 광화문 글판 여름편에는 김경인 시인의 시 '여름의 할일' 2연 첫 2행이 뽑혔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일일까?

그늘은 어둡고 서늘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시인의 말을 빌자면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에 상상력을 보태 읽어보면, 시인은

모르는 사람이었던 '한 용접공'의 인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너무 일찍 날아간 새'처럼 세상을 등진 용접공의 이야기를 듣고 

그늘 같았던 그의 삶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고', 그가 남긴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을 다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다는 건,

찬찬히 바라본다는 것,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마음을 내어 오래 생각한다는 것.

귀를 찢을듯한 울음 뒤에 매미가 남겨놓은 허물들처럼,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걸 내내 꿈꾸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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