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젖은 者는
오규원
巡禮 -1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오규원 시집, 사랑의 기교, 민음사, 1978>
* tirol's thought
어제 갑자기 이 시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2003년 1월에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https://poetryreader.tistory.com/entry/비가-와도-젖은-者는-오규원
2003년의 나는 '이 시를 온전히 해석할 수는 없지만 좋아한다'고 코멘트를 달아두었다.
2021년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이 시를 조금 더 낫게 읽을 수 있게 되었을까?
나아졌는지를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달라진 것 같기는 하다.
시를 조금 더 천천히 여러 번 읽어보고 이런 저런 궁리들을 한다.
어딘가에서 읽어보고 들어본 이야기를 연결지어 떠올려보기도 한다.
시 속의 '비'와 '강'은 '시간'의 은유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번 흘러간 시간과 강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비를 멈출 수 없어/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던' 그대와의 기억만이, 끝없이 젖어가는 시간을 비껴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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