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너무나
박라연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 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들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박라연,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창비, 2018>
* tirol's thought
어제 오후에 우연히 KBS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윤여정' 편을 봤다.
한국 배우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눈부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윤여정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중 강부자씨가 전한 윤여정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언니, 그거 식혜 위 밥풀이야. 식혜 위에 동동 뜬 것. 인기는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
'눈부신 시간'의 한 가운데서 그것이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 같은 것'이라는 걸 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식혜 위 밥풀' 같은 것라고 위트 있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아마도 윤여정씨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의 눈부신 시간은 언제였던가, 벌써 다 지나가버린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영화평론가 이동진씨의 추천으로 넷플릭스에 '보고 싶은 영화'로 찜해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가 떠올랐다.
영화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가기 전 일주일간 자신이 살아온 삶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하나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이 선택한 그 기억 외에 다른 모든 기억은 잊고 선택한 기억 하나만 가지고서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 영원히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재미난(?) 설정을 담고있다. ('원더플 라이프'에 대한 이동진의 영화리뷰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리뷰입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나중에 열어보시길 )
내 삶에서 단 하나의 행복했던 기억, '눈부신 순간'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어떤 장면을 고를 것인가.
아직 그 순간을 고르기엔 너무 이른가, 그래도 가끔은 멈춰서서 지난 세월을 되짚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동동 뜬 식혜 위 밥풀들은 어디로 가는지, 그 세월 사이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들은 어떻게 날고 노래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세월이, 허락도 없이 그 시간들을 데려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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