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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첫사랑 - 심재휘

by tirol 2021. 4. 18.

첫사랑

 

심재휘

 

 

장충동에 비가 온다

꽃잎들이 서둘러 지던 그날

그녀와 함께 뛰어든 태극당 문 앞에서

비를 그으며 담배를 빼물었지만

예감처럼 자꾸만 성냥은 엇나가기만 하고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세월은 갔다

여름은 대체로 견딜 만하였는데

여름 위에 여름 또 여름 새로운 듯

새롭지 않게 여름 오면

급히 비를 피해 내 한 몸 겨우 가릴 때마다

비에 젖은 성냥갑만 늘었다 그래도

훨씬 많은 것은 비가 오지 않은 날들이었고

나뭇가지들은 가늘어지는 운명을 향해 걸어갔다

가늘어지기는 여름날 저녁의 비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로 많은 저녁들이 나를 지나갔지만

발아래 쌓인 세월은 귀갓길의 느린 걸음에도

낡은 간판처럼 가끔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른 꽃잎에게 묻는 안부처럼

들춰 보는 그 여름 저녁에는 여전히

버스만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별도 그대로였다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내 스물두 살이

여태껏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다

 

<심재휘,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 최측의 농간, 2017>

 

 

 tirol's thought

 

얼마 전 끝난 tvN의 수목드라마 '시지프스'에서는 사람들이 '업로더'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현재로 건너온다. 미래의 사람들이 현재로 건너오는 이유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 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만약 '시지프스' 속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간으로 갈까?

 

시인은 첫사랑을 만났던 스물두 살의 장충동 네거리로 갈 지도 모르겠다. 태극당 문 앞으로 뛰어든 시인과 그녀의 첫사랑은 자꾸만 엇나가는 성냥처럼 엇나가다가,  '샴푸향기 잊혀지듯 그렇게' 사그러졌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고, 비가 오고, 저녁이 되고, 꽃이 지고...그러다 어느 귀갓길엔가 문득, 벗겨진 낡은 간판 안 쪽에 씌어있는 희미한 글씨처럼 첫사랑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버스가 무심히 달리는 그 여름 저녁 비가 오는 장충동 네거리 스물 두살의 풍경이 스틸 사진처럼. 

 

내 첫사랑의 좌표와 일시는 어디인가. 스무살의 안암동, 신촌 어디쯤인가? '업로더'를 타고 그 때로 돌아간다면 스무살의 나에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말을 해준다고 듣기는 할까?

 

무슨 얘기를 해줄까 생각하다 보니, 정작 해주고 싶은 얘기는 '사랑'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업로더'를 타고 스무살의 나에게로 거슬러 갈 수 있다고 해도, (대 놓고 말을 할 수는 없을테고) 슬쩍 알려 주어야 할텐데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떨어진 책의 배열로 'STAY'라는 신호를 보내듯이), 그럼 어떤 힌트로 알려주어야 할까?

 

'DO IT' (우리말로는 '해!'?)

 

스무살의 내가 알아들으려나? 그러고 보니 스무살쯤에 (미래로부터 온?) 그런 신호가 꽤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혹시,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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