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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세상의 모든 저녁 1 - 유하

by tirol 2006. 6. 16.
세상의 모든 저녁 1

유하

여의도로 밀려가는 강변도로
막막한 앞길을 버리고 문득 강물에 투항하고 싶다
한때 만발했던 꿈들이 허기진 하이에나 울음처럼
스쳐간다 오후 5시 반
에프엠에서 흘러나오는 어니언스의 사랑의 진실
추억은 먼지 낀 유행가의 몸을 빌려서라도
기어코 그 먼 길을 달려오고야 만다
기억의 황사바람이여, 트랜지스터 라디오 잡음같이 쏟아지던
태양빛, 미소를 뒤로 모으고 나무에 기대 선 소녀
파르르 성냥불처럼 점화되던 첫 설레임의 비릿함, 몇 번의 사랑
그리고 마음의 서툰 저녁을 불러 모아 별빛을 치유하던 날들......
나는 눈물처럼 와해된다
단 하나 무너짐을 위해 생의 날개는 그토록 퍼덕였던가
저만치, 존재의 무게를 버리고 곤두박질치는 물새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기에
오래 견디어 낸 상처의 불빛은
그다지도 환하게 삶의 노을을 읽어 버린다
소멸과의 기나긴 싸움을 끝낸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쓸쓸하게 허물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저녁이 나를 알아보리라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걸으며 사랑 또한 자욱하게 늙어 가리라
하지만 끝내 머물지 않는 마음이여, 이 추억 그치면
세월은 다시 흔적 없는 타오름에 몸을 싣고
이마 하나로 허공을 들어 올리는 물새처럼 나 지금,
다만 견디기 위해 꿈꾸러 간다


* tirol's thought

나는 시인으로서의 유하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그건 영화감독으로서의 유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이 그에게 좀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문학적 완성도에 상관없이 그의 어떤 시들에 끌리기도 한다. 모든 시들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은 시들에서 그는 자주 '엄살'을 피우고, 얕은 감정들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며, 감각이나 스타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이런 시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신 수준이 그 정도군...'이라는 얘기를 들을 것 같은 그런 시를 쓴다. (이건 유하라는 시인의 시에만 해당되는 경우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끌리는 시와 문학적인 성취가 뛰어난 시 사이의 간극, 내 취향이 지향하는 바와 오늘의 내 취향 수준 사이의 거리!) 그래서 가끔 유하의 어떤 시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드러내놓고 하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유행가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될까? 죄, 아니다. (하지만 유행가가 세상 노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복잡복잡 오락가락 우좡좌왕 횡설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