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예보
박준
비 온다니 꽃 지겠다
진종일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2018>
* tirol's thought
시 속의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는 흰색 란닝구를 입고 계실 것 같다.
아버지는 왜 진종일 아무 것도 안하고 마루에 앉아 라디오를 듣고 있었을까.
어디가 아픈가? 마음이 아픈가?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가? 아무 것도 할 게 없는가?
아니면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오늘만 모처럼 쉬고 있는 건가?
'비 온다니 꽃지겠다'
아버지가 오늘 처음으로 한 말은 왜 이 말이었을까.
말이 하기 싫었던 건가? 말이 너무 하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건가? 비가 온다니 걱정이 된다는 건가? 좋으면서도 싫다는 건가? 일기예보를 듣다가 뜬금없이 어떤 일이 생각나신 건가?
말과 말 사이엔 얼마나 많은 말이 숨어 있는 건가.
비와 꽃 사이를 잇는 아버지의 말 속에는 얼마나 아득한 마음이 놓여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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