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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거룩한 식사 - 황지우

by tirol 2024. 2. 23.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년>

 


* tirol's thought

내 힘으로 숟가락을 들 수 있게 된 때부터
오늘까지 밥을 안먹고 보낸 날이 몇 일이나 될까
숟가락을 들어 몸에 한세상 떠넣어준 그 많은 날들 중에
내가 마주 앉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되고
또 혼자 밥 먹은 날은 몇 일이나 될까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동생
따뜻한 밥 놔두고 식은 밥 국에 말아 드시던 어머니
밥 먹는 모습이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기억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한 친구들과 동료들
밥을 먹으면서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왜 밥 먹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건가
왜 쩍벌린 노인의 입 속 같은 아득함이 밀려오는가
나는 어찌 이리 울컥하는가
나이 들어가는 남자라서 그런가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혼자
내 풀어진 뒷머리를 보는 사람이 없길 바라면서
쩍 벌린 내 입을 보고 눈물겨워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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