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떠날 때 1 - 전윤호

by tirol 2006. 8. 23.
떠날 때 1

전윤호


목초가 말라 죽은
저문 들판을 바라본다
이제 돌봐야 할 가축은 없다
말 한 필로 남은 내게
불지른 천막은 짐일 뿐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내게
찾아올 반가운 소식은 없다
나는 떠난다 초승달 아래로
새로운 소 떼를 찾아 하늘의 지붕을 넘고
빙하가 녹은 강을 건너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말 등에 사는 족속에게
이별은 사소한 것
소중한 건
고삐를 잡는 힘이다 나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


*  tirol's thought

내겐 '유목민적'인 속성보다는 '정착민적'인 속성이 많지만 가끔은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건가,
정말 이러고 살아야 하는건가,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는가'라는 생각들로
서성거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금새
'이러고 안 살면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로 갈 것인가,
거기에 가면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따위의 이어지는 생각들이
발목을 묶는다.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
는 사실을 믿는 것은,
그리고 그 믿음대로 떠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오늘도 서성거린다.
제법 오래되었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밤 - 황동규  (0) 2006.08.29
평범에 바치다 - 이선영  (0) 2006.08.25
비누에 대하여 - 이영광  (0) 2006.08.22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 정현종  (2) 2006.08.20
마음의 서랍 - 강연호  (0) 200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