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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 고형렬

by tirol 2020. 9. 12.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형렬

 

 

고성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북천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눈이 내려도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 살아간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바다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북천과 바다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더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나와 북천과 바다는 만날 수 없다

오늘도

그 만날 수 없음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며 길을 간다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성 북천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길을 가다가도

나는 몇날 며칠 그 북천의 가을물이 되어 흘러간다

다섯살 때의 바다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른다섯 때의 아침 바다로

 

다 말하지 못한 것들만 거울처럼 앞에 나타난다

 

 

<고형렬,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창비, 2020>

 

 

 

tirol's thought

 

나에게도 시인의 '고성 북천' 같은 고향이 있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벌초를 가고 가끔씩 날아오는 부고를 듣고 찾아가는 멀지 않은

그러나 점점 더 멀어지는 만날 수 없는 편지 쓰지 않는 찾아가지 않는

멀리서 살아가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멀어지는 

 

고성 북천은 어떤 지명이 아니라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오래된 모든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잊히지 않는 유년의 기억 마음에 오래 남은 풍경 어머니...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내가 걱정한다고 바꿀 수도 없고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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