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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부패의 힘 - 나희덕

by tirol 2004. 10. 8.
부패의 힘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 tirol's thought

"인생은 썩은 막걸리야"

오늘 읽은 백남준의 인터뷰 생각이 난다.
72세의 노 예술가는 온갖 병을 친구처럼 거느리고 제대로 썩어간다.
그의 예술세계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인터뷰는 멋졌다.
그저껜가? 물감을 칠한 피아노를 밀어버리는 '존 케이지에게 바침’이라는 퍼포먼스를 끝낸 후 인터뷰에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까,

"일 많이 하고 잘 놀라고"

어떻게 노느냐니까,

"술 많이 먹으면 돼. 막걸리 먹으면 돼."

라고 한다.

그래, 일 많이 하고 잘 놀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썩어가는 거. 제대로 썩어가는 거. 그래서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

# 백남준의 인터뷰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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