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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by tirol 2004. 10. 6.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 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 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tirol's thought
어제,
요즘 영어를 배우고 있는 Brett과 맥주를 마시다가 우연히
잊고 지내던 내 꿈 얘기를 했다.
영어로 얘길 하다보면 우리말로는 하기 힘든 쑥스럽거나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떠들게 되곤 하는 것 같다.
일단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말을 하기 전에 이 얘기를 해도 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하는 단계를 무심코 지나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말 자체에 내 느낌이나 생각이 좀 덜 무겁게 실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내 꿈.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향한 그리움.

마지막으로 시라는 이름을 붙여 뭔가를 써본지가 칠팔년이나 지났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생뚱맞게 다시 시를 쓸 수 있을 것도 같다는(써보고 싶다가 아니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샐러리맨의 생활에 대해서, 얼핏보면 엄청나게 넓은 것 같지만 결국은 천정이 덮여진 돔 구장에서, 이게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며 이리뛰고 저리뛰는 대한민국 월급쟁이들이 마음 속을 얘기하는 시.

근데, 저녁이 되니까 또 슬슬 자신이 없어진다. 술을 한잔 마시거나, 내일 아침 출근길이 되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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