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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낡고 오래된 파자마 - 윤성학

by tirol 2017. 6. 21.

낡고 오래된 파자마 


윤성학

 

 

사는 게 파자마 같다

어디에 벗어두어도 상관없다

구겨지거나 늘어나거나 색이 바래면서

몸은 파자마에 길들여진다

앞도 없고 뒤도 없다

사는 것은, 사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여기저기 실밥이 터진 꼴을 보다 못한 아내가

파자마를 새로 사왔다

파자마 속으로 퇴근하는 저녁이면

아내보다 파자마가 더

나의 체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두 번만 입어보면 안다

그는 형상기억합금 브래지어처럼

내 몸의 정보를 고스란히 모방한다

누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없이 살고 싶겠는가

파자마를 보면

투둑

가슴이 내려앉는다

여기저기 생활의 솔기가 타지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내가 거기 있기에

무뎌짐도 익숙해지면 그뿐이란 걸 알기에

 

/윤성학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tirol's thought


'누구라고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없이 살고 싶겠는가'


시를 읽고 났는데 마음이 허허롭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앞뒤 가려 가며' 산다는 건 어떤걸까

익숙해진다는 건 축복인가 비극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산다는 것,

초연과 무감각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

파자마를 보며, '투둑/ 가슴이 내려앉는' 시인의 

삶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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