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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서시 - 한강

by tirol 2017. 4. 26.

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

* source: https://goo.gl/8pplzw



* tirol's thought


시도 시지만 신형철씨의 시평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라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신형철씨는 시인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를 '원한없는 삶'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 삶이 어떤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졌더라도/얼룩지더라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마음.'
지금 내 운명은 어디쯤에 있을까? 어떤 자세로 그를 기다려야할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나고, 기다리는 것이 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