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권혁웅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 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여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 백석의<국수>에서
1967년 충북 충주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대학원 졸업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으로 등단
2000년 제6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저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 <시적 언어의 기하학>
2001년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5년 <마징가 계보학> 창비
2007년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 source: https://goo.gl/VlxXPl
* tirol's thought
비가 와서 그런지, 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다.
어머니는 비가 오면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주셨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어머니가 직접 반죽을 해서, 홍두깨로 판판하게 밀고, 칼로 썰어낸, 그 '빼뚤빼뚤'한 칼국수가 도통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비가 오면 칼국수 생각이 난다. 비 오는 날 사무실 근처 칼국숫집엔 손님들이 미어터진다는 걸 알면서도 칼국수를 먹으러 가곤 한다. 그리고 그 칼국숫집의 면발과 국물맛을 옛 기억 속 미각과 비교해 보곤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 속의 칼국수 맛은 희미하다. 뚜렷한 건 칼국수를 만들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오늘 칼국수야? 라면 먹으면 안 돼?"라고 불평하던, '작았고 말랐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생일이라서 그런지, 국수를 먹어야 할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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