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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개 발자국 - 김광규

by tirol 2023. 10. 8.

개 발자국
 
김광규
 
 온몸이 누런 털로 덮이고 슬픈 눈에 코끝이 까맣게 생긴 녀석.
 뒤꼍 개집에서 봄여름 가을 나고, 겨울에는 차고 한구석에서
 뒷발로 귀를 털면서 나이를 먹었지.
 늘그막엔 주인집 거실 바닥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놈은 이 세상에 태어나 열여덟 해를 혼자 살았다.
 물론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주인 내외와 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고무친의 외톨이 아니었나.
 천둥 벼락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놈이 위층 서재까지 뛰어 올라와
 주인의 책상 아래 몸을 숨기기도 했다. 겁이 났던 모양이다.
 놈을 야단치고 밖으로 쫓아내는 악역을 맡은 바깥주인도 이럴 때는 못 본 척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준 셈이었다.
 
 이렇게 정든 놈이 몸뚱이만 남겨놓고 세상 틈새로 사라져버린 다음,
 나뭇잎 하나둘 허공을 맴돌며 떨어져 마당을 뒤덮는 가을밤이면,
 사박사박사박 낙엽 밟는 작은 발자국 소리...... 놈이 아직도 뒷마당에서
 돌아다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자는 동안 밤새 소리 없이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은세계로 바뀐
 겨울 아침이면, 국화빵처럼 생긴 발자국이 뒤뜰 여기저기 남아 있는 때도 있다.
 평생 살던 곳 떠나지 못하고, 놈은 아직도 우리 집 마당을 바장이고 있는가.
 
 <김광규, 그저께 보낸 메일, 문학과 지성사, 2023>


 

tirol's thought

 

개 나이 계산하는 법을 찾아보니 크기와 상관없이 태어난 지 2년이 되면 사람 나이로 약 24살이 된 걸로 보고,

그 다음부터는 개의 크기에 따라 소형견은 1년당 4살, 중형견은 5살, 대형견은 6살로 계산을 한다고 한다. 

시 속의 개가 중형견이라면 녀석은 사람 나이로 104세, 만약 대형견이었다면 120세를 산 셈이다. 

같은 계산법을 적용하면 내일 두번째 생일을 맞는 우리 집 순이는 이제 사람 나이로 24살이 되고 내년 10월에는 28살이 된다.

사실 개 나이를 굳이 사람 나이로 환산해 보는 게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가족처럼 정이 들었다가 훌쩍 먼저 떠나버릴 가능성이 높은 존재가

덧없이 속절없이 그냥 가버리고 만 건 아니라는 걸,

제 족속의 기준으로 보면 그래도 넉넉히 살다가 간 거라는 걸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시의 마지막 행에 나오는 '바장이다'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락가락 거닐다.'라는 뜻이다.

죽고서도 평생 살던 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던 집 마당을 '바장이는' 개의 소리를 듣는 시인은 다시 개를 키울 수 있을까

순이가 앞으로 열여섯해를 더 살고, 세상 틈새로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내일과 오늘 사이를 바장이는 나를 

순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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