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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

알 수 없어요 - 황인숙 알 수 없어요 황인숙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 tirol's thought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딱히 구분하기가 애매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멍하니 있는 것'과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바다와 내 좁은 방은 얼마나 멀리있나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거나 눈을 잠시 감았다 뜨거나 천천히 고개를 뒷쪽으로 돌리거나 그러면 거기 바다가 있거나 들판이 있거나 하늘이 있거나 하지는 않을까 거미줄처럼 얽힌 행간을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여기 2019. 6. 29.
춘추 - 김광규 춘추 (春秋) 김광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 tirol's thought 3연 13행의 시 속에 봄부터 가을까지 세개의 계절이 들어있다. 망설임과 아내의 눈치와 물난리와 열대야를 거쳐 봄에서 가을로 꽃 피는 소리에서 잎 지는 소리로 잎 지는 소리와 다시 꽃피는 소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2019. 6. 22.
산산조각 - 정호승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tirol's thought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내게 부처님이 우연을 가장하여 보내 주신 시가 아닐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머리로 몰랐던 건 아닌데, 그런데 머리로만 아는 걸 안다고 해야할까 불쌍한 내 머리 부서져야하리 산산.. 2019.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