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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 베르톨트 브레히트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베르톨트 브레히트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지 압니다! 우리가 아플 때마다 사람들은 선생님이 우리를 낫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선생님께선 사람들의 돈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학교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또 선생님의 지식을 위해 돈을 쓰셨다고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선 저희를 낫게 하실 수 있겠지요. 저희를 치료하실 수 있나요? 누더기 옷이 벗겨진 채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희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우리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를 한번 흘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우리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이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 2022. 8. 12.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 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2022. 8. 10.
밤이 오면 길이 - 이성복 밤이 오면 길이 이성복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그대여 머뭇거리지 마라 물결 위에 뜨는 죽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머니 눈길 위에 떠 있고,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대여 지나가는 낯선 새들이 오면 그대 가슴속 더운 곳에 눕혀라 그대 괴로움이 그대 뜻이 아니듯이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왔다 바람 부는 날 유도화의 잦은 떨림처럼 순한 날들이 오기까지, 그대여 밤이 오는 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보아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tirol's thought 지난 일요일 저녁, 외출했다가 집에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었는데 '저녁'에 관련된 시 네 편을 읽어주는 코너가 있었다. 김종삼, 정끝별, 채호기, 그리고 이성복 시인의 시였다. 다른 시들은 다 읽어.. 2022. 8. 3.
장편 掌篇 2 - 김종삼 掌篇 2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川邊 一○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一○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 tirol's thought 5월 8일. 어버이날. 전국의 불효자들이 바쁜 날. 페북에서 우연히 이 시를 보고 몇번을 다시 읽었다. 태연한 거지 소녀의 흐릿한 미소와 거지장님 어버이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어버이 살아 계실 때, 나는 이 소녀처럼 마음 다해 밥 한번 대접한 적 있었던가. 2022. 5. 9.
목도장 - 장석남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 tirol's thought 아버지는 무슨 서류에 그렇게 도장을 찍고 다니셨기에 도장이 문턱처럼 닳았을까 헐거워지는 국경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 어스름이면 생각나는 것들 낙관도 찍고 표구도 되었는데 그림은 비어있다네. 아버지가 물려주신 흐린 나라는 빈 그림으로 내 앞에 있네. 2022. 1. 11.
비가 와도 젖은 자는 -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者는 오규원 巡禮 -1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 tirol's thought 어제 갑자기 이 시가.. 2021.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