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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by tirol 2018. 11. 9.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 source;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419.html


tirol's thought


'천진하게'와 '물끄러미' 사이의 멀고도 먼 거리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천진하게'의 쪽에서 '물끄러미'의 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일까.

돌아갈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

하긴 일방통행이라고 해서 모든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멈춰있는 차. 자의든 타의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영원히 멈춰있을 수도 있고.

시 속의 화자는 '사과나무의 꼭대기'를 보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지만

나는 그렇게 울었던 옛날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생각을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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