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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지문 - 권혁웅

by tirol 2005. 7. 7.
지문

권혁웅


내가 모르는 일이 몇 가지 있으니
바위에 뱀 지나간 자리와 물 위에
배 지나간 자리와 하늘에 독수리가 지나간 자리
그리고 여자 위에 남자가 지나간 자리*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도무지 모르지, 손가락마다
소용돌이를 감추어두고 사는 일
손잡을 때마다 타인의 격정에 휘말리는 일
내 삶의 알리바이가 여기에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개들은 짖고
먼지는 손에 묻고
버스는 떠나고
비행기는 하늘에 실금을 그으며 날아간다

나는 개를 먹고 개처럼 짖고
개털은 날리고 나를 따라
먼지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다니고
내가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떠나가고 비행기는 활주로에
길고 긴 타이어자국을 남긴다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흩어진 머리카락,
여기에 내가 아니면
네가 누워 있었을 것이다


*전도서 30:19
**양희은의 노래에 나오는 구절

/권혁웅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문학세계사, 2001/


* tirol’s thought

시를 읽다가 손가락을 들어 지문을 한참 들여다본다. 손가락마다 감추어 두었던 소용돌이. 어지럽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은 왜 이리도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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