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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작은 짐승 - 신석정

by tirol 2001. 9. 13.
작은 짐승

신석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가 있었다. 나(안도현)와 그애와의 연애는 스물 두어 살 무렵부터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그 시절 나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하루도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가슴에 보듬고 있던 문학청년이었다. 문학은 나에게 끊을 수 없는 마약이었고, 구원의 종교였고,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을 이 세상이 가르쳐 주는 길을 남들처럼 따라 가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연애는 늘 쓸쓸하였다. 나는 애인에게 은반지를 선물로 건네주는 대신에 가을이면 갈대가 서서 우는 금강 하구의 저녁 풍경을 보여 주었다. 나는 애인에게 근사한 레스토랑을 보여 주는 대신에 틈만 나면 시장통의 질척질척한 막걸리 냄새를 맡게 해주었다.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그 여자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준 적이 있었다. 신석정의 <작은 짐승> 이었다. 그 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참 좋은 시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시를 내가 쓴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한 동안 그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쓴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애가 실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엉뚱하게 그 애한테 물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속에 숨어 있던 못된 짐승이 고개를 들고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라는 단편을 읽다가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를 다시 만났다. 강백란(康白蘭)이라는 예쁜 이름의 그 여자는 중국인이다. 그 여자는 중국만로 '칸 파이 란'이라고 부른다. 그 여자는 일본에 밀입국하여 몸을 팔다가 병이 들어 죽었다. 일본인 남자 주인공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그저 호적상으로만 남편일 뿐이다. 그 여자의 위장 취업을 위해 남자가 돈을 받고 호적을 빌려준 것이다. 이 남자는 여자의 유품을 수습하러 갔다가 뜻밖에도 여자가 죽기 전에 써놓은 애절한 편지를 전해 받는다. 그 러브레터에는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 대한 그리움, 미안함, 고마움이 서툰 일본말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 편지를 통해 남자는 그 여자의 진심이 무엇인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 여자를, 이미 죽어 버린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강백란.......칸 파이 란......소설 속의 그녀도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지금, 연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를 한 번 읽어 주지 않겠는냐고. 굳이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이 아니더라도, '英'이거나 '淑'이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 한 편 읽어 주는 사랑을 좀 해보자고. 英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淑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그 구닥다리, 그 고색 창연한 사랑법이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없던 다리를 놓고, 이미 놓여진 다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시는 사랑의 열정을 퍼올리는 펌프이니까. 그래, 시읽기는 펌프질이니까.

부디 연애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 한 편 읽어 주지 않은 사내하고는 다시 만나지 말기를. 그리고 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 다리가 저릴 때까지 서 있어 본 적이 없는 여자하고는 당장 절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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