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인파이터 - 이장욱

by tirol 2010. 12. 22.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에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source: http://blog.naver.com/kori210?Redirect=Log&logNo=60053471011

* tirol's thought

어제 조광희 변호사의 글을 읽다가 이 시를 알게 되었다.
그는 시의 첫 행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행일까, 불행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교정은 어두워져 있다.'는 말이 인용된 싯구 다음에 이어져 있었다.

시를 찾아 전문을 읽어본 후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에 대해 나도 한참을 생각해 봤다.
'안전'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추구하는 또는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일 수는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 많은 산업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여 번성한다.
'더 안전해지세요. 지금 그냥 있으면 큰 일 나요. 투자하세요. 대비하세요. 미래를 준비해야죠.'
사람들은 노후의 '안전'을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매서 연금저축을 들고,
자식들의 '안전'한 미래를 위해 과외를 시키고 기러기 아빠의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과연 '안전'을 얻을 수 있을런지도 의문이지만,
'안전'을 얻은 다음의 삶은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에 비해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를 자처하는
시인의 자세는 쉴새없이 흔들린다.
시 속의 생경한 이미지들도 원색의 모빌처럼 흔들린다.

불안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삶의 본질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불안이 끝나는 순간,
삶도 끝나는 것이 아닐까?
죽음보다 안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음새꽃 - 곽효환  (0) 2010.12.30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  (0) 2010.12.29
바닥 - 문태준  (0) 2010.10.18
선취船醉 - 정지용  (0) 2010.08.18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 이성복  (0) 2010.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