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by tirol 2001. 12. 3.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는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二十(이십)원 때문에 十(십)원 때문에 一(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tirol's thought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 밤의 기억 뒤끝에 이 시를 떠올렸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분해하고, 욕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 부끄러운 장면들. 평소에는 점잖은 척, 예의바른 척, 남을 배려하는 척... 아니 '척'이 아니라 때론 내가 정말 그런 인간이 되어가고 있느 중이 아닐까라고 스스로 믿어보기도 하지만...내 안엔 실제로 얼마나 옹졸하고, 비열하고, 유치하고, 거만하고, 욕심많고, 완고한 내가 자리잡고 있는지. 회칠한 무덤같은 나. 새삼스럽게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 것에 대한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엽서 - 문태준  (2) 2002.01.15
성탄제 - 김종길  (0) 2001.12.24
너라는 햇빛 - 이승훈  (0) 2001.11.29
그랬다지요 - 김용택  (5) 2001.11.28
분지일기 - 이성복  (0) 2001.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