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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쓸쓸한 날에 - 강윤후

by tirol 2001. 9. 16.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질없이
바람에 기대어 귀를 연다. 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타전할지 모르므로

강윤후,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 지성사,1995.

* tirol's thought

어떤 단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 '쓸쓸함"이란 단어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가질까? 난? 친근한, 오래된 친구같은, 그러나 가끔은 벗어나고 싶은.
어제는 오랫만에 제법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허풍을 떨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들키지 않을 거짓말. 더 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어수선한. 시시껄렁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기저기에 전화. 쓸쓸한 자는 가끔씩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어쩌면 그대 보이지 않는 어디 먼데서 가끔씩 내게 안부를 타전할지 모르는" 때문이라기보단, 그냥... 쓸쓸해서.그러나 술이 깨고 나면, 쓸쓸한 자는 더 오랫동안 쓸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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