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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by tirol 2011. 3. 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tirol's thought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딱히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잘 알면서도 쉽게 우울해지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나마 어린 아들과 놀면서 가끔 슬픔 없는 십오 초 정도를 느끼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된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을 걸어야 하는 자는 슬프다.
이 슬픔을 어찌 견뎌낼꼬.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시인선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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