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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예수 - 고진하

by tirol 2003. 2. 18.
예수

고진하


바닥의 바닥까지 낮아지신 그분의 사랑을
너는 찬양한다. 그분의 이름을 껑충 딛고 올라선
너의 노래는 하늘을 찌를 듯 요란하구나

그러지 마라.
그분의 밝은 눈이 너의 위선(僞善)을
모를 리 없다. 다물 줄 모르는 너의 입술을 치료하기 위해
저 바닥의 바닥에 떨어진 피묻은 씨앗 하나
너도 모르게 자라나고 있으니......

*

높고 크신 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해
계시다 한다. 그런 말로
그분을 침묵의 무덤 속에 가두어놓고
방심(放心)하지 말라.

울타리 밖의 도둑이 그대가 감춘 보물을
호시탐탐 엿보듯이, 그분은
그대 안에 값진 보물이 있음을
눈치채기 바라신다.

누가 그분의 시퍼런 눈길을 피할 수 있으랴 !

*

나는 소금인 적이 없다
그대 입에 들어가는 밥이나 국에 간맞추기를 원하면
그대 집의 소금항아리를 열라.

나는 빛인 적이 없다.
해의 기생식물인 해바라기처럼 나에게 기대어
그대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말라.

세상이 오해하듯, 나는
세상의 중심(中心)인 적이 없다.
자꾸 날 맴돌며 그대의 중심이 되어달라고
떼쓰지 말라.

간혹, 태풍의 중심인 적은 있다.
회오리 바람과 해일을 일으켜
그대 삶의 기둥뿌리를 뽑고 지붕을 날렸던가.

그러니,
오해의 비늘을 털어내고 똑똑히 나를 보라. 나는
그대의 값싼 연정(戀情)을 짓밟는 파괴자!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당신의 고백은,
당신이 나에게 먹히고 싶다는 고백이다. 과연
당신은 나의 밥이 되었다

별미(別味)는 아니지만
당신을 포식하고 나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먹은 것이 소화되어
하늘빛 날개를 달아주었으니까.

그렇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풀어놓아 준다는 뜻이다 애시당초
내 안에 없는 족쇄를 풀어주기 위해
당신은 죽었다
이제 일어나서 가자, 내 안의 나여.

/고진하시집, 얼음수도원, 민음사,2001/


* tirol's thought

그렇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풀어놓아 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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