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왔나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 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 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tirol's thought
'채독'이 뭔가 싶어 찾아봤다.
채독 菜毒
[채ː독]
1. 채소 따위에 섞여 있는, 채독증을 일으키는 독기.
2. 의학 구충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
요즘 아이들도 '채독'에 걸리나 모르겠다.
아마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
시인은 어떤 심정으로
'장다리 밭에 뒹굴며/ 꽃밭을 결딴내는'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빈방에 누운 시인은
'장다리 밭에 뒹구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뒹굴 힘조차 없이 가만히 누워있다
늙은 까마귀 같이 무서운 날들을 예감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켜 권하는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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