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은영
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릴 집, 부서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판,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
* tirol's thought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저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네' 싶어도
막상 그리려면 어렵다는 걸 알게 되듯이
'나는'이라는 제목 뒤에 서술어를 갖다 붙이는 일쯤은
'그까이 게 뭐 별 건가, 나도 할 수 있겠네' 싶어도
막상 써보려고 하면 '그까이 게' 별 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이미지을 좇아가기에 굳어버린 상상력
이런 걸 써도 되나 이게 뭐야 사이를 오가는 자기 검열
나는, '나는' 뒤에 어떤 문장을 이어 쓸 수 있으려나
눈을 꿈뻑거리는 커서, 밤새 혼자 웅얼거리는 티브이, 한쪽 다리가 부러져버린 의자,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품은 거실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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