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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꽃 지는 저녁 - 정호승

by tirol 2009. 5. 26.

꽃 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정호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2008.9. 열림원.

* tirol's thought

오랫만에 올려보는 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라는 말은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이광재 전 의원이 쓴 편지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지난 토요일부터 내 마음도 황망하다.
솔직히 정치적으로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이 인간적인 매력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보여준 소탈한 모습들,
예를 들어 그의 사후에 많이 회자되고 있는
담배를 집어들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풀 썰매를 타는 모습이라던가,
손자 손녀를 태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라던가
하는 모습들에 마음이 많이 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경솔하다'라고 비난했던
그의 크고 작은 언사들을 나는 오히려
좋게 생각했었다.
비서관들이 써준 원고를 앵무새처럼 읽는 정치인들은 많고 많지만
그 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그 파격,
사실 그건 앵무새들에 비해서 파격이지
엄정하게 생각하면 그런 그가 정상이었다.
그건 마치 외눈박이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두눈박이가 이상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외눈박이들의 비난과
그들이 파놓은 올무에 걸려 괴로워하다가
결국 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마음이 아프다.
정말 아프다.
게다가 지금도 그 고집불통 외눈박이들은
그를 애도하는 길목조차 막아서고 있다.
서울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전경버스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 맞는가?
이 정권은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가?
북파공작원들의 추모 집회를 위해 기꺼이 내 주었던 그  광장을
전 대통령의 추모 집회를 위해 열어 주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백번, 천번을 생각해도 모르겠다.
제기랄.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잊지 않으려고 않으려고 노력해서
잊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잊을 수 없어서
잊으려고 애써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세월이 가도,
세월이 갈수록
더욱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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