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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안도현

by tirol 2009. 5. 29.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안도현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버티다가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 찢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

저 가증스런 낯짝의 거짓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저 뻔뻔한 주둥이의 위선 앞에서 억울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저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 앞에서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때리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붙이고 맞추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 tirol's thought

6월 중순까지 마무리해야 할 논문 때문에 오늘 하루 휴가를 냈다.
사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가려고 휴가를 내느냐고 물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논문을 많이 쓰지도 못했다.
시청 앞에 가지도 못하고, 논문도 못쓰고,
열시반부터 두시까지 TV로 영결식과 시청 앞 노제를 지켜봤다.
영결식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한승수 국무총리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조사.
두 사람의 조사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형식적인 빈말들로 가득찬 현직 국무총리의 조사와
듣는 이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
차라리 한승수 국무총리의 조사는 없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제.
내외 귀빈들로 가득찼던 경복궁 뜰 앞 '그들의' 영결식과
시청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열린 노제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안도현 시인의 조시를 들으면서 나는
행사가 끝난 후 행여라도 시인이 이 정권에게 '찍혀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다면 나는 이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이에나', '가증스런 낯짝', '뻔뻔한 주둥이', '무자비한 권좌'...
우리는 이 말들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노제의 제관 역할을 맡은 도종환 시인의 말도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치인의 말과 시인의 말을 차례로 겹쳐보며 나는
정치와 문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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