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ㅡ 1000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ㅡ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ㅡ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ㅡ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ㅡ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 문학할 거야''
ㅡ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는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생진, 그 사람 내게로 오네(시로 읽는 황진이), 우리글, 2004/
*백석(白石· 1912∼?):시인. 본명은 기행(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 평북 정주 출생. 1929년 오산고보 졸업 후 도꾜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 수학. 1934년 조선일보 출판부 입사 <여성>지 편집. 1935년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36년 시집《사슴》간행. 이동순 편《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1987).
**김영한(金英韓·1916∼1999): (본명은 김진향).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열여섯 살 때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白石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과거 고급 요정의 대명사였던 서울 성북동 대원각(당시 1000억을 호가)을 법정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해 길상사(吉祥寺)로 변신케 했다. 김씨는 지난1951년 서울 성북동 청암장을 인수해 '대원각'으로 개명, 국내 3대 요정의 하나로 키워냈다. 그는 30년대 후반 시인 백석과 3년간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창작과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자주 들르는 블로그에 백석의 시가 올라온 걸 읽다가, 백석의 여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웹에서 우연히 이 시를 찾았다.
쓴 사람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이생진 시인이다.
'자야(子夜)'는 애인이 사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 백석이 지어준 아호인데,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라고 한다.
창 밖에 눈이 푹푹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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