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by tirol 2024. 10. 17.

개 같은 가을이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 tirol's thought

‘개 같은 가을‘, ‘매독 같은 가을‘은 어떤 가을일까
일단 분위기 있고, 여유있는 가을은 아닌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 온다.
싸움을 걸듯, 전쟁을 하듯, 밀고 들어온다는 얘기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아 당혹스럽다
이 ‘개 같은 가을‘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2연의 술어들만 살펴보면,
’잃고/문드러지고/시들고/돌아오지 않는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와서 만들어 놓은 폐허의 풍경들 같다
폐허 속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시 속의 화자는 안타깝게 묻는다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분명히 벨이 울려서 받은 전화인데
전화기 저편의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다

이런 답답할 노릇이 있나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이곳은 저승인가 이승인가
여기는 강인가 바다인가
어디까지가 강이고 어디부터가 바다란 말인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을까 과연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