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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강 - 황인숙

by tirol 2010. 6. 18.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 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 지성사, 2003.

* source: http://bomnoon.tistory.com/256


* tirol's thought

구글 리더에 등록해 둔 '친구' 목록의 리스트에 두 개의 새 글이 올라왔다.
그 중 하나에는 이 시가 있었고,
또 다른 하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나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고, 그 뜻을 왜곡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열명이 채 되지 않는다. 나의 아내, 부모님, 형제, 가장 친한 친구 한 두명. 나머지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나를 받아들인다."

행복한 녀석, 뭘 더 바란단 말이냐?

누구보다 심하게 자기방식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목록에
아내, 부모님, 형제, 가장 친한 친구를 포함시켜야만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다.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는 시인의 말이 아니어도
나도 이제 더 이상 토로할 곳이 없음을 깨달을만큼
철이 들었다.
'직접 강에 가서'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강은 너무 멀고,
'오래된 돌 틈에 이야기를 남기고 흙으로 막는' 화양연화의 양조위처럼
이곳에 몇 줄 이야기로 끄적이고 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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