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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 - 김성규 어금니를 뺀 날의 저녁김성규 이를 빼고 난 후 혓바닥으로 잇몸을 쓸어 본다말랑말랑하다 물고 있던 거즈를 뱉을 때 피 냄새살고 죽는 것이 이런 것들로 이루어졌구나내 삶이 가진 말랑함어린 강아지를 만지듯 잇몸에 손가락을 대 본다한 번도 알지 못하는 감각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살 만한 것인가이빨로 물어뜯는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말한다이를 잘 숨기고 필요할 때 끈질기게 물어뜯으라고이렇게 부드러운 말 속에피의 비린 맛이 숨어 있다니그러니 그들은 늘 자신의 것을 놓치지 않는다이제는 살고도 죽고도 싶지 않은 나이오늘도 나는 시장에 간다 뺀 이를 다시 사고 싶어그러나 내 잇몸에 맞는 것은 없고구름이 핏빛 솜뭉치로 보인다, 라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울고 있는 갓난아이와 유모차를 밀며늙어 죽어가는 노.. 2025. 5. 19.
나는 - 진은영 나는진은영너무 삶은 시금치, 빨다 버린 막대사탕, 나는 촌충으로 둘둘 말릴 집, 부서진 가위, 가짜 석유를 파는 주유소, 도마 위에 흩어진 생선비늘, 계속 회전하는 나침판, 나는 썩은 과일 도둑, 오래도록 오지 않는 잠, 밀가루 포대 속에 집어넣은 젖은 손, 외다리 남자의 부러진 목발, 노란 풍선 꼭지, 어느 입술이 닿던 날 너무 부풀어올랐다 찢어진* tirol's thought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저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네' 싶어도막상 그리려면 어렵다는 걸 알게 되듯이'나는'이라는 제목 뒤에 서술어를 갖다 붙이는 일쯤은'그까이 게 뭐 별 건가, 나도 할 수 있겠네' 싶어도막상 써보려고 하면 '그까이 게' 별 거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이미지을 좇아가기에 굳어버린.. 2025. 5. 2.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 2025. 4. 22.
빈방 - 김사인 빈방김사인나 이제 눕네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왔나봐저물어가는데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장다리 밭에 뒹굴고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봄날의 좋은 볕과환호하던 잎들과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늙은 까마귀 같이무서운 날들이오고 있네자, 한 잔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그래도 한 잔tirol's thought'채독'이 뭔가 싶어 찾아봤다. 채독 菜毒[채ː독]1. 채소 따위에 섞여 있는, 채독증을 일으키는 독기.2. 의학 구충에 감염되었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요즘 아이들도 '채독'에 걸리나 모르겠다. 아마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 시인은 어떤 심정으로'장다리 밭에 뒹굴며/ 꽃밭을 결딴내는''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 2025. 4. 17.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 마종기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마종기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2024. 12. 17.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 허수경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허수경 저녁에물새 하나가 마당으로 떨어졌네 툭,떨어진 물새 찬 물새훅,밀려오는 바람내 많은 바람의 맛을 알고 있는 새의 깃털 사막을 건너본 달 같은 바람의 맛울 수 없었던 나날을 숨죽여 보냈던 파꽃의 맛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을 본 양나의 눈썹은 파르르 떨렸네 늦은 저녁이었어꽃다발을 보내기에도누군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기에도 너무 늦은 저녁찬 물새가 툭 하늘에서 떨어지던 그 시간 나는 술 취한 거북처럼 꿈벅거리며바람내 많이 나는 새를 집어들며 중얼거리네 당신,나는 너무나 젊은 애인였어나는 너무나 쓴 어린 열매였어 찬 물새에게 찬 추억에게 찬 발에게그 앞에 서서 조용히깊은 저녁의 눈으로 떨어지던 꽃을 집어드는 양.. 2024.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