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황동규8

그날, 정림사지 5층 석탑 - 황동규 그날, 정림사지 5층 석탑 황동규 성긴 눈발 빗방울로 뿌리다 다시 눈발 되어 날리는 눈발 날리다 다시 빗방울로 흩뿌리는 그런 지워버리고 싶은 날. 텅 빈 뜨락에 혼자 있는 그대 크도 작도, 늙도 젊도 않게 속 쓰리지도 않게 뒤로 돌아가 보아도 어디 따로 감춘 열(熱)도 없이 눈 비 속에서 잊힌 듯 숨쉬고 있다. 그 들숨 날숨 안에 들면 사는 일이 온통 성겨진다. '춥니?' '아니.' '발끝까지 젖었는데?' '어깨가 벌써 마르고 있어.' '조금 전에 우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네 눈으로 본 걸 옮기지.' /문학사상 2003년 4월호/ * tirol's thought '네 눈으로 본 걸 옮기지' 소문과 추측과 짐작과 억지 투성이의 세상을 향해 석탑이 그윽하게 하는 말이 참 근사하다. 2003. 7. 29.
풍장·27 - 황동규 풍장·27 황동규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tirol's thought 사람의 오감중에서 가장 무딘 감각기관이 '청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귀가 한번 '트이면'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알 수 없는, 느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고 들었다. (지독스러운 오디오 매니아들이 그 예다) 내 귀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나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기'는 커녕 바깥에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둔한. '세상 뜰 때' .. 2003.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