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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펌) 어떤 정물, 귤과 매화와 책꽂이 - 장석남

by tirol 2003. 1. 2.
어떤 정물, 귤과 매화와 책꽂이 ― 브람스의 소품 <무언가>

장석남(시인)

노란 귤들이 있다. 하나는 껍질이 벗겨진 채 반만 있다. 귤들이 놓인 흰 접시에 떨어진 불빛은 당연히 귤과 함께 따뜻한 빛이다. 껍질들이 어지간히 말라서 이 귤을 먹은 게 언제더라 싶다. 귤 옆에는 전화기가 놓였다. 오래된 구형 손 전화기다. 내가 전화기를 하도 자주 잃어버림으로 이번엔 새로 사지 말라며 후배가 물려준 것이다. 잃어버려도 괜찮도록 아무도 욕심내지 않는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래도 통화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대견하다. 그 곁에는 녹차 잔이 놓여 있다. 일인용 다구(茶具)이기 때문에 그 뚜껑에는 차 잎들이 젖은 채 담겨져 있다. 차 맛을 생각해 본다. 녹차는 뭐니뭐니 해도 첫잔이 제일 좋다. 약간 뜨끈해야 좋다. 절에 가서 스님들에게 얻어먹는 녹차는 내 잎 맛에는 너무 식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많았다. 정수기의 온도대로 우려먹는 맛에 익숙해진 나의 녹차는 그래서 따뜻한 편이다. 한 서너 번은 우려먹고는 놓아둔 녹차 잔이다.

겨울이 되면 실내에 난로를 놓고 살고 싶었다. 연탄 난로도 좋고 갈탄 난로도 좋을 것이다. 제일 좋은 건 역시 나무 난로지만 도회지에서 나무 난로를 지금 때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나무가 없고 나무를 쟁여 둘 창고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럴 만한 실내가 없다. 그래도 나는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난로를 놓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 두면 종일토록 물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에 그 소리는 정말 정겹고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겠는가. 두 손바닥을 활짝 펴서 찬 손을 녹이고 그 곁에 소설책을 두고 읽는다면 그 시간은 꿀맛일 것이다. 간혹 무릎이 따가워 손으로 비벼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매화가 피었다. 지금은 조금 남았다. 작년에는 일월에 피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빨리 핀 것이다. 원인이 뭔지 모르겠다. 날이 춥지 않아서일까? 내가 잘못 키운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매화 곁에서 녹차 한 잔 했다. 그걸로 그 꽃의 짙은 향기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 암향은 정말 어디에 비길 데 없다. 지금도 떠오르면 코끝이 얼얼하다.

겨울이 깊어지면서부터는 음악을 틀어도 격렬한 것보다는 조심스런 소품들을 듣게 된다. 마치 깊은 산에 눈 덮인 소나무에 쌓인 눈들이 떨어질세라 조심하는 듯이. 이즈음 듣는 것이 브람스의 무언가(無言歌)다. <종달새의 노래>, <삽포의 송가>, <노랫가락처럼 흘러간다>, <다시 너에게 가지 않으리>, <사람의 아들들에게 임하는 바는>,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 <죽음이여, 고통스런 죽음이여>, <황무지를 건너서>, <사랑의 진실>, <내 잠은 점점 잦아드네>, <여운> 등등의 제목이 붙어 있지만 가사는 없는 곡이다.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는 감미롭고 그래서 대중적이지만 그래도 이런 겨울날 저녁에는 좋다. 더 좋은 것은 반주다. 파벨 길릴로프의 피아노는 느리고 명상적이다. 파벨 길릴로프의 피아노가 언덕이라면 마이스키의 첼로는 거기 언덕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눈발과도 같다. 때로는 짙고 때로는 가늘게 이어진다. 특히 <종달새의 노래>를 시작하는 그 힘겨우며 꽉 찬 감정의 출발은 눈물겨운 것이다. 겨울의 쓸쓸함이 없이 이 노래만 들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창밖에 눈이 오는 날은 나는 이,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쓸쓸한 곡을 틀어놓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

백석의 시를 꺼내 읽는다. <멧새 소리>라는 시다.


처마끝에 明太(명태)를 말린다
明太는 꽁꽁 얼었다
明太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明太다
門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팔을 베고 누워서 이 서양음악을 듣고 있지만 저 서양 음악은 내 마음을 '멧새 소리'의 저 적막한 산골로 안내한다. 춥고 외롭고 쓸쓸한, 그러나 높은 저 외로움의 품격을 나는 브람스에게서도 받아들이고 백석에게서도 받아들인다. 이런저런 이유로 음악에서 국적을 말하는 것은 어딘지 촌스러운 일인 것이다.

책꽂이에서는 노자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빛나고 있다.


[출처] http://www.ssts.co.kr/zine/2003zine/01/2003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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