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의자 - 김명인

by tirol 2002. 11. 26.
의자

김명인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 tirol's thought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
라는 구절은 이문구의 소설 제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번 읽어봐야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롤의 첫번째 포임레러  (2) 2002.11.27
사랑 - 김수영  (0) 2002.11.26
빈 마당을 볼 때마다 - 장석남  (0) 2002.11.08
엄마 걱정 - 기형도  (0) 2002.11.07
어느 맑고 추운 날 - 박정대  (0) 2002.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