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생
천양희
부판(蝜蝂)이라는 벌레가 있다는데 이 벌레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천양희 시집,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천양희
부판(蝜蝂)이라는 벌레가 있다는데 이 벌레는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천양희 시집, 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 tirol's thought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견딜 수 없을만큼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지만(그런가? 가끔은 나도 곡괭이를 팽개치고 싶기는 하다.) 나도 어느날인가, 오르다가 말고, 걸어가다가 말고 죽게 되겠지. 완결된 인생이 어디 그리 흔한가.
짐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견딜 수 없을만큼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지만(그런가? 가끔은 나도 곡괭이를 팽개치고 싶기는 하다.) 나도 어느날인가, 오르다가 말고, 걸어가다가 말고 죽게 되겠지. 완결된 인생이 어디 그리 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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