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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분지일기 - 이성복

by tirol 2001. 11. 24.
분지일기

이성복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십자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울고 있어요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류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둥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
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
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 불고 머리칼 쥐
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 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층이 깊었다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지금 경사를 타고 내려와 미류나무 한 이파리에
멈추는 햇빛, 짧아져 가는 햇빛
지금 내 입술에 멈추는 날카로운 속삭임
나는 괴로와했고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지금 짧아져 가는 그 햇빛을 가로지르는 것들은 아름답다
오래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가자, 막을 헤치고 거기 가자
부서진 구름도 따스하게 주위를 흐르는 곳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 해가 땅에 꺼지도록
아무 말도 할말이 없었다
길에서 창녀들이 가로막았다
어쩌면 일이 생각하는 만큼 잘못되지 않은 거라고
생각도 했다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가슴은 여러 개로 분가하여 떼지어 날아갔다
그것들이야 먼 데 계시는
내 어머니에게로 날아갈 테지만
젖은 불빛이 뺨에 흘렀다
날아가고 싶었다, 다만, 까닭을 알 수 없이


*tirol's thought

날아갈 수 없는 나는 게걸스레 읽는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게워내야할 것 같을 때도 있다.
비루하고 지리멸렬한 삶이다.
술먹고 토할 때 흐른 눈물이 안경에 묻어 굳어 있다.
침묻혀 안경을 닦으면서 참 쓸쓸했다.
넌 나같이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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