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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북방에서 - 백석

by tirol 2006. 2. 11.
북방(北方)에서
정현웅(鄭玄雄)에게

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녯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녯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이동순 편, 백석 시 전집, 창작과 비평사, 1987/

* 쏠론(Solon) : 남방 퉁구스족의 일파. 아무르강의 남방에 분포함.
* 돌비 : 돌로 된 비석
* 미치고 : 몹시 불고
* 보래구름 : 많이 흩어져 날리고 있는 작은


* tirol's thought

지난 금요일 우연히 KBS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박노자 교수가 이 시를 읽는 걸 봤다.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 어떤 한국 사람보다도 이 시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한 감정과 톤으로 이 시를 읽는 그를 보면서 '전생이라는 게 있다면 정말 저 사람은 분명 골수 한국 사람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낭송을 마친 후 그는 이 시의 핵심어로 '태반(胎盤)'이라는 말을 꼽았다. 그리고 감회에 가득차서 그 말이 주는 느낌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가끔 그의 어떤 글들을 읽을 때처럼 놀랍고, 한편으로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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