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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번역_로마서의 메세지

by tirol 2002. 11. 26.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Ray C. Stedman 목사님이 쓰신 Adveturing  through the Bible 이란 시리즈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간결하고 성경읽기를 막연히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글인 듯 하여 번역을 시작했는데 아직 로마서 부분 밖에 못했습니다.(현재 마태복음편 번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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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메세지      

바울이 로마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글인 로마서는 분명히 지금까지 쓰여진 인간의 기록들 가운데 가장 호소력 있는 기록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한 금과도 같다. 로마서는 마틴 루터의 가슴에 불을 당겼으며, 개신교의 개혁을 만들어냈고,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런던의 한 채플에서 루터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있었던 웨슬리의 가슴을 뒤흔든 것도 바로 로마서이다. 요한 웨슬리는 로마서의 진리가 펼쳐져 감에 따라 그의 심장이 이상스레 뜨거워졌다고 말한다. 프랑스와 같은 운명으로부터 영국을 구하고 영국적 삶의 부패을 잠재우며 세계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위대한 복음주의적 각성이 그를 뚫고 지나갔다.
로마서는 이 책의 능력있는 진리를 설명하면서 신학적인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시대의 신학자 칼 바르뜨의 마음 속에서 불타올랐던 글이기도 하다. 그는 형편없고, 공허한 19세기의 자유주의로부터 그것을 불러내어 유럽의 교회들에게 많은 진리들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로마서를 읽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삶은 엄청나게 변화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몬타나의 한 교회는 한때 그레이트 폴즈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교회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 교회의 목사가 시카고에 와서 과연 근본주의 목사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볼 요량으로 무디 교회엘 갔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로마서를 가르치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강의를 들고 그의 마음은 완전히 멧세지에 매료되어버렸다. 강의가 끝난 후 그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박사는 그에게 로마서에 대한 자신의 글을 복사해 주었다. 목사는 몬타나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로마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레이트 폴즈에 도착할 무렵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는 설교단으로 올라가서 로마서의 진리들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그 교회는 변화되었다. 내가 본 것은 바로 로마서라는 책의 능력으로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인 교회가 몇 년새에 복음주의의 증거로서 변모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이 위대한 서간문에 다가가면 그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왕성하게 유발시킬 것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챤들에게 쓴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궁핍한 성인들을 위하여 아시아의 교회들로부터 돈을 모아가지고 예수살렘으로 다시 올라가기 전에 고린도에에서 몇 달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로마의 교회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오순절에 변화받고 그곳으로 돌아간 크리스챤들이 교회를 시작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전해듣고 그것을 최대한도로 완성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바울은 그들이 온전히 진리 위에 서기를 바랬다. 따라서 이 편지는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 멧세지를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거의 모든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이 책말고 성경의 다른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아마 이 책에서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모든 성경의 마스터 키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당신이 정말로 로마서를 전체적인 주제 속에서 제대로 파악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장 1절에서 17절 까지의 소개 부분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로마의 크리스챤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모든 뛰어난 소개글이 그러하듯이 그는 여기서 편지의 핵심이 되는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편지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질 수있다. 1장부터 8장, 9장부터 11장, 12장부터 16장까지로 나누어진 부분들은 자연스럽게 한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발전 성장해 간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처음의 8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셨으며, 그가 몸과, 정신, 영혼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교리적 설명이다. 9장부터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묘사한다. 12-16장은 실제적인 부분으로 이 모든 능력의 진실이 인간 상황 속에 적용된다. 따라서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 단순한 윤곽선들만 기억한다면 당신은 로마서의 열쇠를 쥐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주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신념이나 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삶, 당신 안에서 새롭게 살아지는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 한다. 이것이 편지의 주제이며 로마서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기 때문이다. 사실 나와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붙잡고 싸우는 문제다. 로마의 기독교인들도 그랬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작업을 시작하시는 기본적인 재료이다. 우리에게 유효한 모든 것이 그들에게도 유효하듯이  바울이 그들에 관해 묘사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세 번째로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하나의 모범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는 예로서, 'A급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를 알게하고 명확히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요약을 필요로 한다. 나는 성경의 어떤 기록들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주요 주제, 즉 어떤 기록의 근간이 되는 사상을 모아보려고 노력해왔다. 그것은 멧세지의 강력한 힘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너무나 논리적인 발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세부적인 것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논의를 계속해서 추적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바울이 그의 주제를 전개시켜가는 압도적인 논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를 읽어가다보면 우리는 바울이 우리를 위해 복음의 엄청난 진리를 얼마나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장에서 복음의 중심이 되는 확언이 보인다.

내가 복음을 부그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 누가 하나님의 능력을 부끄러워하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며 복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이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어디로 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뭘 위해 사는지 알지도 못하던, 목적도 방향도 없던 낙심한 젊은이의 삶을 어느날 갑자기 변화시키고 그에게 목표를 주고 힘을 주며 의미를 줄 수 있다. 그것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살아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복음안에서 보여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

이 인용은 하박국에서 따온 것인데 마틴 루터의 심장에 불을 지른 바로 그 구절이다. '복음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제이다.
이것에 대한 필요를 견고히 하기 위해, 바울은 그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본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2장과 3장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그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분석하고, 명백하게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도 있다. " 사람들은 두 계층의 사람이 있다. 의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사람이다. 그리고 이 분류는 언제나 의로운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몇 년전 나의 아이들이 매우어렸을 때 하루는 뒷뜰에 나갔다가 누군가가 담장 벽의 중앙에 백묵으로 선을 그려놓은 것을 보았다. 한 쪽 편에는 "좋은 사람들" 이라고 써져 있었고 다른 쪽 편에는 "나쁜 사람들" 이라고 써져 있었다. "나쁜 사람들"이라는 큰 글씨 아래로는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죽 적혀있었다. 다른 편에는 이웃집 아이들의 이름이 있었다. 분류는 언제나 "의로운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명백하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인 의롭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첫 번째로 그는 양쪽 다 하나의 구절 속에 요약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롬 1: 18)

이것은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인간에게 문제는 그가 진리를 가졌으나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신 그들은 진리를 막는다. 만약 당신의 그 증거를 원한다면 나는 당신이 당신 자신과 당신 주위 사람들의 삶을 잠시동안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무의식 아래로 밀어넣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삶의 경쟁 속에서 그처럼 바쁘게 살아가면서 혼자있기를 싫어하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지 않고 사물들을 진정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으며 언제나 삶의 부단한 소용돌이 속에서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이유이다. 진리의 억압,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이 억압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인류에게 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진노는 이 장이 전개되어가면서 우리에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번쩍거리는 번개도 아니고 길을 벗어난 불의의 사람들이 내팽개쳐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나는 너희들이 어떤 것을 하는 걸 원치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희들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들이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너희들은 잘못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을 하면서 동시에 그 선택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반복되는 구절에서 세 번이나 제시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셨다." 그것은 이러한 조건의 결과이다.(29-31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 29-31)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의 적의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극악하게 불순종하며, 법도를 지키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살고, 자신의 즐거움만을 쫓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는 반항적인 사람들의 조건이다. 그 결과는 도덕적인 부패와 생명의 자연적인 방향을 뒤집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 장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성적인 충동들은 전도되어 남자들이 남자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여자가 여자에게 내어주게 된다.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인간이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는 어느 곳에서라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의 전부는 아니다. 2장에서 사도바울은 다른 면, 즉 '선한' 면으로 향한다. 이제까지 공공연하고 비열한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대중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라고 불리우는 "선한 사람들"을 향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다. "잠깐만!"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물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하이니라. (롬 2:1)

이어 가장 놀랄만한 방법으로,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글쎄, 우리는 이런일들을 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구요. 우리는 담배들 피지도 않고 흥청거리지도 않아요. 우리는 성적으로 음란한 곳에 출입을 하지도 않죠. 우리는 법을 지키고 예절바르게 행동한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들도 또한 그것을 좀더 드러내놓고 저지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위에서 언급했던 어떤 죄악들을 저지른다. 그들도 적의, 다툼, 속임수, 원한, 비방, 중상등에 빠진다. 그들 역시 "죄악을 만들어내는 자들이다. 그들도 또한 "우둔하고, 믿음이 없고, 냉혹하며, 무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만 그것을 외면적인 꾸밈으로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내면엔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서로에 대한 냉혹, 시기, 질투, 다툼, 악을 품고 있다.
여기서 당신은 인간성의 본모습을 알 수 있게된다. "니꺼나 잘해"류의 사람들이 한편에서 이렇게 도덕적이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낸 후 말한다. " 저 위선자들을 봐. 난 10피트짜리 막대로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겠어." 그리고 모든 "도덕적이고 존경할만한"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보면서 이야기한다. "음란하고 방종한 무리들을 봐. 우리는 저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의 전능하신 눈으로 인간들을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모두다 똑같은 죄인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나와서 말한다. "저는 어때요? 저는 유태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남다른 특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바울은 이 주장을 검토한 후 유대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의 배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남다른 특권에도 불구하고, 그도 타인에 대한 똑같은 마음의 증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인류는 예외없이 구속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제 그것은 복음의 길을 준비한다. 인간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결론은 잘 알려진 이 구절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19-20)

그리고 이어 23절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빌립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그 마지막 절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구원의 기초를 세워놓는다.
구원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준다. 이것은 당신에게 익숙한 것이다. 의롭다함을 인정받음, 죄사함을 얻음, 성스럽게 됨이 그것이다. 4장은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3장의 말미에서 이 주제를 시작하였다. 3장의 말미에서 그는 우리에게 의롭다함을 입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를 당신앞에 의롭게 세우신다는 것이다. 다른 이가 우리자리에서 대신 죽는 것이다. 다른 이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겐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면적으로 도덕적이고 존경받을만한 삶을 사느냐 아니면 모든 구속을 걷어차버리고 보헤미안이나 히피처럼 살든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양쪽 다 유죄이다. 어느쪽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다. 어느 쪽도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의로움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얻어질 수 있다. 그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이 있다. 우리들은 세겹의 존재들이다. 우리는 영혼과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온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하시는가 말해준다.
그는 인간의 가장 심오한 영역이 영혼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나님은 영혼에 그의 성령을 불어넣으신다.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는, 의을 준다. 따라서 의롭다 함을 입는 것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죄를 전혀 짓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되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는 의로움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죄악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
바울은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그들은 모두 할례나 율법을 준수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인간이 하는 어떤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원칙에 따라서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 어떤 종교적인 주문이나 이를 수 없는 기준들에 맞춰 살려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눈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사람들은 그의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였고 보았으며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다윗은 비록 간음과 살인이라는 이중의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고,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돌리시지 않는" 자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롭다함을 주시는가에 대한 구약의 예들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챤들이 여기에서 멈춘다.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에 관한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영혼 외에도 정신과 육체라는 것들이 또한 존재한다. 5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정신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되어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에게 정신은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육체가(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를 다스린다. 자기 중심적인 특징들을 가진 아담의 삶이 우리를 소유한다. 우리의 영이 의롭다함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의 지배와 굴레 아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운명이 정해졌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은 여전히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악의 영향권 아래 있게 된다. 그것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가끔은 의롭다 함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해보게 하고, 삶을 지배하며 이기심과 자기 중심주의를 조장하는 죄악의 무자비한 굴레를 다시 경험하게 하곤 하는 비참한 삶이 계속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죄사함(정하게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운명이 죄악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와진 것 처럼 죄악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기를 원하신다.
5장에서 바울은 우리들을 위한 전체 계획의 윤곽을 알려준다. 그는 인류를 아주 근본적인 분류로서 아담에게 속한 인간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으로 인류를 나누고 그것들을 차례 차례 설명한다. "보라, 너희가 아담에게 속한 인간이었을때(즉, 당신이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 너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원칙들 위해서 행동했다. 너희는 자연스럽게 행동했고, 바로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었다. 너희는 그것을 계획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희는 아침에 일어나 얼마나 나쁜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않았느냐? 다시 선하게 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려고 너 자신을 점검하지도 않았고, 갑자기 너의 말을 어기고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시 선하게 된 그런 너를 발견하지도 않은 적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너는 네 안에 있는 아담의 삶을 단지 드러냈을 뿐이다. 너는 어린아이적부터 어떻게 행동해야될지를 배운 것이고 그것들은 네 주변에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인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이제 당신이 크리스챤이 되었음으로 하나님은 그 옛 삶에 무엇인가를 하신다고 말한다. 그는 당신으로부터 아담의 삶을 잘라내신다. 당신은 더 이상 타락한 아담에게 속하지 않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인간이다. 따라서 당신의 삶은 이제 그와 연결되어있다. 그분는 이제 아담이 당신을 통해 그의 삶을 드러냈던 것과 똑같이  자연스럽게 당신을 통해 그의 삶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당신이 아담안에서 경험한 패배와 고통과 아픔과 구속과 맹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경험하게 될 승리와 영광과 축복과 평화와 기쁨에 의해서 완전히 극복될 것이다. 당신이 그 과정을 배우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선해지는 것은 아담 안에서 악하게 지냈던 것 만큼이나 쉽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갈등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실행하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에 당신은 희미하게 그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고심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정말로 보게되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하게 되면 당신은 한때 죄악이 당신을 지배하여 죽음으로 끌고가던 그곳에서 이제 그리스도가 당신을 지배하시며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이 삶 속에서 당신은 아담 안에서의 패배만을 경험하던 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6장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도 또한 그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한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담의 삶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삶에 우리를 이어놓았다고 말씀하셨다면, 당신은 정말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주 오랫 동안 계속되어온 우리의 감각은 우리에게 다르게 이야기 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곧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실이 실현되는 단계 속으로 점점 더 가까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담 안에서 당연히 악한 존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당연히 선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그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가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시작한다. 매일 매일 당신이 고난과 유혹의 상황 속에 빠져들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실이며 그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됨을 기억해야만 한다. 비록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안에 있는 악함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고 그래서 당신은 잘못된 일들을 해야만 한다고 느낄 것이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삶에서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거나 당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들이 당신에게 닥쳐올 곤경들이다. 그러나 당신은 누구를 믿겠는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당신은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며 그 원칙에 맞게 살겠다고 생각해 보겠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곧 그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당신은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7장은 이 문제에는 두가지 수준의 이해와 경험이 있다는 사실로 향한다. 우리는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도 이미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아담의 육적인 삶의 어떤 면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기심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성적인 불행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도둑질과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육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ㅇ안에 있는 나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우선 그것이 우리가 반응하는 수준이다. 우리는 거짓말하기와 도둑질가 다른 외면적 악행들을 그만둔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꼬리표를 붙여 두었던 것들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의 크리스챤으로서의 경험속에서 추구하는 것에 대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경험 속에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그가 그 자신과 싸우고 있는 내적 투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육체의 "좋은"면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쁜"면 만큼이나 정말로 나쁘다는 점이다. 자기의 노력,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노력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진보나 즐거움이나 호의를 얻어보겠다는 노력들, 이 모든 것들이 "나쁜 것"들 만큼이나 나쁘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될 때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통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로 옮겨진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완전히 경험하기 시작하며 우리를 위하여 그가 마음에 두고 계신 영광과 승리의 능력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것이 정신의 죄사함이다.
그렇다면 육체는 어떠한가? 8장은 이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육체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지만 영혼이 의롭다함을 받고 정신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언젠가 육체까지도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보증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우기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임재속으로 들어가게될 때 우리는 몸과 정신과 영혼 모두 완벽한 상태로 그분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8장의 말미에 위대하고 굉장한 찬미의 노래 속으로 폭발한다.  
9장부터 11장은 이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쫓아온 사람이라면 분명히 품게 될 의문들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우선, 9장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주권을 가진 존재이며 그의 주권은 내가 어째서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해 준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된 선택에 관한 모든 문제는 우리가 이 전반적인 문제들을 정말로 있는 그대로 보게 도와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중립적인 상태에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살고 행동하는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추락의 상태로 떨어질 것인가 구원받을 것인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경주는 이미 아담안에서 패배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장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주에 진 자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구원받을 권리를 잃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이렇게 그는 가장 능력있는 방법으로 우리 앞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선택을 마련해 놓으신다.
10장에는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에 연결시킨다. 그는 구원이 믿음의 선택임을 보여준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내려오시게 하기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죽은자들 가운데서 그를 불러오기 위해 무덤을 팔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약 당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겠다고 계획을 세운다면 당신은 이렇게 해야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하늘 나라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려오게 하고, 그가 잠시 이땅에 머물다가 죽으며 무덤을 파서 그를 다시 살게 만든다음 그를 올려보내야 한다. 순전히 당신의 힘으로.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하겠는가? 물론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예수는 주'이시라는 말이 이미 당신의 입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들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당신의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11장은 하나님께서 이방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잠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똑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존재, 타락한 본성인 육체를 완전히 버리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 가운데 무엇을 하실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실제에서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는 그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은 결코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크리스챤으로 얼마나 오래 지내왔던지간에 온전히 그에게 의지하는 길 외에,  우리 스스로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거나 그리스도를 더 잘 섬길 수는 없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오직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뿐이다.
그러므로 오만은 우리의 가장큰 유혹이며 가장 무서운 적이다. 언젠가 우리의 육체도 그의 은혜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모든 만물이 죄의 굴레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의 육신들 속에 나와 서실 그날에 한때 부인되고 저주받았던 우리의 육체 조차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약속을 성취하도록 만들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셨는가에 이 모든 것이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를 11장 33절의 말미에 있는 찬가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마지막 부분인 12장에서 16장은 삶 속에서 이러한 진리들을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다룬다. 여기서는 한 두가지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2장 1절 말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즉, 바울이 당신에게 선언하고 있는 이 모든 위대한 것들에 대하여, 당신이 삶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하고, 이성적이며, 사려깊고,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드리고 그를 위해 사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당신을 어느 정도까지 완성시킬 수 없다. 그러니 당신 자신을 그분에게 드리라. 그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삶이 모든 관계들 속에서 변화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로 12장의 뒷부분이 보여주는 것처럼 당신의 형제들과의 관계가 변한다. 당신의 몸을 바치는 것은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12장의 후반부와 13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것은 권세자들과 전체 인류와 모든 사회와 당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14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의 내적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약자들을 향한 당신의 태도는 당신이 크리스챤이기 전의 태도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15장)에 대한 당신의 태도도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이전에 가졌던 것과 훨씬 다른 이유로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뜨거운 열정이 생겨날 것이다.  
바울의 맺음말은 근사하다.(16장 25절-27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을 쫓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롬 16:25-27)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 위대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소서. 우리가 그 진리들에 우리를 맡기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것들을 배우고 이해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들을 실천하게 하셔서 당신이 성자들을 위해 주셨던 유산들 속에서 가능한 놀라운 잠재력들이 완성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 예수여 우리 속에 당신인 남겨주신 것과 관련되어있는 모든 것들을 발견하시고 이루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