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근황 - 최승자

by tirol 2005. 5. 26.
근황

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 지성사/


* tirol's thought

누군가를 죽을만큼, 죽고 싶을만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이 시에 끌리는 이유는 그 절박한 '사랑'보다는 '잘 살아 있습니다'라는 근황과 '못 살겠습니다'라는 근황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인의 마음 때문이다. '잘 사는 것'과 '못 살겠는 것' 사이의 거리, 멀고도 가까운.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드로 1 - 조정권  (0) 2005.06.08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0) 2005.06.01
게 - 권대웅  (0) 2005.05.17
어제 - 박정대  (1) 2005.05.16
악어 - 고영민  (0) 200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