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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獨居 - 이원규

by tirol 2004. 7. 6.
獨居

이원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쁘게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있을 때
나는 일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시집 <옛 애인의 집> 2003. 솔


* tirol's thought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있는
여의도의 지하철 역은 깊다.
한강 밑으로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올라와야 지상이다.
출근길의 사람들은 영리하다.
가장 빠르고 편리한 통로를 기억한다.
마포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은 주로
맨 앞칸이나 맨 뒷칸에 많이 탄다.
한 층을 올라가면 에스컬레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떠밀리고 떠밀며 사람들은 몰려간다.
그런데 가끔 많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올라가는 방향에서 반대편으로 20미터쯤가면
에스컬레이터 없이 계단으로만 된 통로가 있는데
그 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쪽이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쪽으로 가기도 하고
또 어느날인가는 '비장한(!)' 표정으로 텅빈 반대편 통로를 향해 걷기도 한다.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걸 일 삼아
제대로 놀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내공인가.
사람들이 어느쪽으로 가든 제 길을 즐길줄 아는 사람.
하지만 난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반대편으로 발길을 돌이키는 데 '비장한' 표정이 필요하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길로 갈껄,
내가 괜한 어깃장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가벼운 후회도 해보고.

오늘 아침엔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통로로 나왔다.
내일은 어느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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