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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2

두부 - 고영민 두부 고영민 저녁은 어디에서 오나 두부가 엉기듯 갓 만든 저녁은 살이 부드럽고 아직 따뜻하고 종일 불려놓은 시간을 맷돌에 곱게 갈아 끓여 베보자기에 걸러 짠 살며시 누름돌을 올려놓은 이 초저녁은 순두부처럼 후룩후룩 웃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을 듯한데 저녁이 오는 것은 두부가 오는 것 오늘도 어스름 녘 딸랑딸랑 두부장수 종소리가 들리고 두부를 사러 가는 소년이 있고 두붓집 주인이 커다란 손으로 찬물에 담가둔 두부 한모를 건져 검은 봉지에 담아주면 저녁이 오는 것 두부가 오는 것 * tirol's thought 갓 만든 두부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시다. '저녁, 소년, 두부장수...', 이런 말들 때문인지 김종삼 시인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저녁'이라는 이미지에 무의식적으로 .. 2019. 8. 11.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나무 한 권의 낭독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 2008.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