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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3

가을에 - 김명인 가을에 김명인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 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백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 tirol's thought 비를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비가 한번 내리고 나면 가을은 한결 깊어지겠지. 시간을 받아들이며 너덜너덜 낡아가는 잎사귀들이 부럽다. 내게도 달려있는 '무성한 초록 귀때기마다 퍼어런/잎새들'을 본다. 아직 벗지 .. 2006. 10. 17.
집 - 김명인 집 김명인 새집들에 둘러싸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내 사는 집이 낡아간다 이태 전 태풍에는 기와 몇 장 이 빠지더니 작년 겨울 허리 꺾인 안테나 아직도 굴뚝에 매달린 채다 자주자주 이사해야 한재산 불어난다고 낯익히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며 빌라로 죄다 떠나갔지만 이십 년도 넘게 나는 언덕길 막바지 이 집을 버텨왔다 지상의 집이란 빈부에 젖어 살이 우는 동안만 집인 것을 집을 치장하거나 수리하는 그 쏠쏠한 재미조차 접어버리고서도 먼 여행 중에는 집의 안부가 궁금해져 수도 없이 전화를 넣거나 일정을 앞당기곤 했다 언젠가는 또 비워주고 떠날 허름한 집 한 채 아이들 끌고 이 문간 저 문간 기웃대면서 안채의 불빛 실루엣에도 축축해지던 시퍼런 가장의 뻐꾸기 둥지 뒤지던 세월도 있었다 * tirol's thought.. 2006. 3. 30.
의자 - 김명인 의자 김명인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 2002.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