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윤학
낮 동안, 제 집을 쫓아다닌 그림자
저녁에 문 앞에 와서 보니, 그 그림자가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잠긴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으로부터 쫓겨난 영혼이다
나는 지금도 집에 가기 위해 목발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집을 찾아가기 위한 목발,
내 영혼도 목발을 짚고 쫓아와 있다.
평생을, 아픔을 끌고 다녀야 하다니!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문학동네 시집 22, 이윤학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
이윤학
낮 동안, 제 집을 쫓아다닌 그림자
저녁에 문 앞에 와서 보니, 그 그림자가
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잠긴 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으로부터 쫓겨난 영혼이다
나는 지금도 집에 가기 위해 목발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집을 찾아가기 위한 목발,
내 영혼도 목발을 짚고 쫓아와 있다.
평생을, 아픔을 끌고 다녀야 하다니!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문학동네 시집 22, 이윤학 시집,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 /
* tirol's thought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난 이 시에서 이 문장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한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제임스 조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에피퍼니’의 순간을 낚아채서 낡은 언어의 칼로 펄떡이는 회를 뜨는 사람이 시인이다.
횟집의 식탁 위에서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의 살점을 음미하는 일이 꼭 편안하지만은 않듯이(고백하자면 사실 난 아직 그런 회를 못 먹어봤다) 그런 시를 읽는 일은 불편함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시는 그런 게 아닐까?
“나를 생각할 때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없다”
난 이 시에서 이 문장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낭만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한 문장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제임스 조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에피퍼니’의 순간을 낚아채서 낡은 언어의 칼로 펄떡이는 회를 뜨는 사람이 시인이다.
횟집의 식탁 위에서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의 살점을 음미하는 일이 꼭 편안하지만은 않듯이(고백하자면 사실 난 아직 그런 회를 못 먹어봤다) 그런 시를 읽는 일은 불편함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시는 그런 게 아닐까?